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북 9성 (문단 편집) ==== 두만강 이북 700리설 ==== [[파일:동북 9성 점령 예상도.jpg]] [youtube(dOr0KAwkSbI)] KBS에서는 여러 학설 중 이 학설에 대해 이야기 했다. 일본의 학자들이 주장한 함흥 평야설도 나왔으나 평가는 좋지 않다. 제1학설은 왜 안나왔는지 의문. 중국(?) 조선 초기 기록인 『고려사』, 『세종실록 지리지』, 『용비어천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문헌들을 토대로 공험진의 위치가 [[두만강]] 북쪽으로 700리가 되는 곳(공험진 외방소) 즉, 두만강 북쪽 일대에 걸쳐 있었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세종실록지리지]]에 공험진이 소하강에 있었다고 기록한 것을 근거로 삼고 있다. >'''Ⅰ. 머리말''' >고려의 북쪽 국경이 어디까지인가에 대해서 현재까지 다수의 논란이 있어 왔으나, 아직까지 정설(定說)은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행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고려의 국경을 대체로 압록강 하구에서 원산만까지 이어진 것으로 확정적으로 비정하여 서술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의 여러 사료들을 검토해 보면, 현행 한국사 교과서와는 상당히 다르게 고려의 북쪽 국경을 서술할 여지가 있다. > >'''Ⅳ. 문헌과 현지답사에 의한 공험진·선춘령 위치 비정''' >"공험진·선춘령은 동북9성 중 가장 북단에 위치하였으며, 선춘령에는 고려의 경계를 알리는 상징성을 지닌 “고려지경(高麗之境)”이란 글이 새겨진 비석을 세웠다. Ⅲ장의 <표 1>에서 살펴본 것처럼 동북9성 지역은 고려 예종 때뿐만 아니라 조선 전 시대에 걸쳐 역사적·군사적·외교적·행정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또한 공험진은 선춘령 인근의 최전선에 세운 군사적 목적의 거점이었다. 다시 말해 동북9성 중 윤관 등의 여진 정벌 목적 혹은 정벌의 역사적 의미를 가장 잘 함축하고 있는 지역이 바로 공험진과 선춘령인 것이다. 그러므로 동북9성 연구에 있어서, 공험진·선춘령의 위치를 비정하고 또 그 현재적 위치를 찾아내는 작업은 가장 우선적으로 이루어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연구가 필요함에 따라, 필자는 2015년 10월 6일부터 7박8일 일정으로 공험진·선춘령의 현재적 위치를 찾는 현지답사를 진행하였다.[* 현지에서 만난 홍석립자촌의 한 거주자 노인은 단지 수분하 건너편의 산에 오래된 성터가 있고, 그 성터가 ‘고려국’이었다는 얘기를 들으며 자랐다고 전한다.] ··· 「중략」 "역사적으로 두만강 이북에 있는 공험진 이남부터는 조선의 관할 지역임을 주장하여 명으로부터 11처 지역의 여진 귀속 문제를 승인받았고, 이것으로 볼 때 조선 초기에는 공험진이 두만강 이북에 있었다는 확고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고려 예종 이후 여진 정벌을 통해 이룩한 국경을, 공민왕 때에도 실질적인 점유와 관계없이 선춘령 이남을 대외적인 국경선으로 주장하여 역사적 영유권을 갖게 되었다. 또한 원명 교체기의 조선왕조도 고려의 영토관을 계승하여 선춘령 이남 지역은 조선의 영토로 한다는 역사적 성과를 올렸던 것이다. 나아가 『세종실록』 「지리지」와 『용비어천가』 및 『신증동국여지승람』등의 공험진·선춘령 관련 기록을 토대로 직접 현장을 답사하여 보면, 이 기록들은 현지 조사 자료를 근거로 한 것임이 분명함을 알 수 있다. 이들 문헌자료들의 거리와 지명 등을 근거로 현지를 답사하여 고증한 결과 공험진은 오배산성에 비정할 수 있고, 선춘령은 고려령에 위치했음을 비정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실지 답사를 통하여 공험진과 선춘령의 위치가 파악되며, 동북 9성은 실제로 기록에 나오는 대로 두만강에서 북쪽으로 700리 지점에 위치했다는 것을 명확히 확인할 수 있었다." >---- >〈고려 윤관이 개척한 동북9성의 위치 연구 中, 이인철 경복대 교수,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국학연구원, 2017, vol.23, pp. 247-292 (46 pages)〉 다만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은 세 가지 정도의 의견이 사서 내에서도 서로 충돌하고 있고, [[4군 6진]] 개척을 위한 명분성 주장이라는 지적 또한 존재한다. 더 나아가 1330년대 사료인 《동인지문사륙(東人之文四六》에 당대 《윤관전》을 인용하여, "9성의 폭과 둘레가 7일 일정"이라고 기술한 것을 바탕으로 정평에서 회령까지 12일 반이 소요되는 만큼, 고려군이 [[축지법]]을 쓰지 않고서야 두만강 이북으로 진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는 적극적인 비판도 학계내에서 제기된 상황이다.[* 홍성민(2021), "금대 사료 등의 재검토를 통해 본 고려 윤관의 여진정벌", 東洋史學會 2021年 春季硏究發表會: 동아시아사의 보편성과 특수성.] 요약하면 두만강 이북 700리설은 9성 반환에 대하여 찬성하던 고려 측의 주장들 중 방어상의 문제점[* 거리가 멀어서 방어하기가 힘들었다.]은 일단 만족한다고 하지만 사료상에 나타나는 이동거리상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문제가 존재하는 학설이라 볼 수 있겠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